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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생애

유년기는 불행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난 그 다음 해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사이 밤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미 죽어 유복자였고 1개월 일찍 태어난 미숙아라 몸이 양말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고 해요. 3살에 어머니 한나가 재혼을 해 집을 떠나는 바람에, 뉴턴은 외할머니 마저리의 집에 남겨지게 되었는데요. 외삼촌인 목사 윌리엄도 그를 자주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새아버지 바나바스 스미스는 뉴턴의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교구 목사였는데 의붓 아들인 뉴턴과 갈등이 심했다고 해요. 이러한 점이 뉴턴의 괴팍한 성격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죠. 새아버지를 매우 증오하여 때때로 그를 죽이는 상상을 하고, 집을 불태우겠다고 협박과 폭언도 일삼았으며, 새아버지가 죽자 매우 기뻐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뉴턴은 처음부터 공부에 두각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하는데요. 처음 입학하였을 때 뉴턴의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는데, 당시 뉴턴보다 조금 더 성적이 나았던 한 학우와의 다툼 후에 그에게 경쟁심을 가져 공부를 진지하게 시작하게 되었다고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학우는 따라잡았으나, 이미 뉴턴은 공부에 재미를 붙여 그 뒤로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고, 케임브리지를 다녔던 삼촌의 조언을 따라 케임브리지 입학 시험을 보고 1660년에 18살의 나이로 케임브리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광학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망원경을 발명해낸 업적을 인정받아, 1669년에 신학에 투신하기로 뜻을 굳힌 아이작 배로우의 후임으로서 입학 후 약 10년 만에 케임브리지의 루카스 수학 석좌 교수직으로 올라서게 되었죠.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말년에 성질이 더러워져서 성질 괴팍한 노인네라고 불렸다고 하는데요. 그래도 전해오는 말로는 제자들이 "선생님이 한 업적이 많습니다."라고 말하자 피식 웃으면서 하던 명언이 있습니다. “난 겨우 꼬맹이에 지나지 않고, 내가 한 업적이라는 건 그 꼬마가 바다에서 주운 조개껍질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네. 바다에는 더 많고 더 엄청난 업적이라는 게 많으니 자네들도 그 꼬마의 조개껍질을 덮는 엄청난 발견을 할지 누구도 모르는 일 아닌가?”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